*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고전 13:4~7)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않는 세상 사람이든 다 함께 "사랑"을 말하고 노래합니다. 국어사전에는 사랑이란 용어를 관념의 형태로 여러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도덕, 윤리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해석하려 합니다. 즉 보편적인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사랑이신 하나님(GOD)과 하나님께 속한 자들만이 말할 수 있는 용어라는 사실을 믿음 있는 성도라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의 본질을 알지 못하므로 이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측면에서 설명하려 하고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인 용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연필”을 설명할 때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연필을 보여주며 이것이 연필이다 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형이상학적인 용어 중 행복, 사랑, 등을 설명하라면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다만 마음으로 느낄 수밖에 없으니... 그런데 마음의 상태가 사람마다 같지 않으니, 어떤 이는 행복을 따뜻한 느낌이라 하고 어떤 이는 행복을 평안한... 등, 즉 주관적인 지라 학설이 나오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를 불변의 진리로 설명할 수 없기에 정의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주관적인 사고로 사랑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의는 성경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 4:16)
여러 구절들이 많지만 몇 구절만 찾아 보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 사랑"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 하나님의 공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기에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 "불의(不義)을 기뻐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는 곧 불의를 멸한다는 뜻입니다. 혹자는 이 뜻이 어려워 아가페적인 사랑이 어떻게 잘못된 불의를 두고 멸하실까? 의문을 갖습니다.
필자가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양 무리 안에 늑대를 두는 것이 온전한 사랑입니까? 아니면 양 무리 안에 늑대를 멸하는 것이 온전한 사랑입니까? 즉 하늘나라는 이와 같이 불의한 자를 함께 두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도하실 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맞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신데, 이를 두고 많고 적고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를 잘못 깨달아 하나님은 공의(公儀)보다 사랑을 더 많이 베푸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기도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사랑이란? 사랑 안에 공의, 자비... 등, 이 모두가 함축되고 포함된 용어입니다.
필자가 이렇게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마지막 날까지는 온전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필자 역시 불완전하기에 여러 형제 자매님들 앞에서 배우고자 함께 교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의를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필자의 의를 들어내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들을 통해 그의 일들을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며 이를 행하는 자들은 게으른 자가 되지 않기 위해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또한 "생명"이십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여기 말씀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라는 뜻은 내 목숨을 내어준다는 뜻이니 이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희생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가르침의 뜻은, "하나님의 참 진리이신 사랑을 온전히 소유하지 않고는 그 어떤 희생과 능력을 행하여도 참 생명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 진리가 내 안에 인침 바 되면 참으로 자유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5~36)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 8:31~32)
또 말씀을 더 보겠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2)
여기 말씀에 내 계명이란, 하나님의 계명임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을 말할 때는 대부분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랑으로 이해하려 하고 자신들의 잣대로 사랑을 실천하려 합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엄청 어려운 말씀인 동시에 매우 쉬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예수님(성령의 가르침)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니 내가 예수님(성령의 가르침) 안에 들어가 있지 않고는 참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인도함이 아니고는 누구도 참 사랑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 사랑 안에 거하면, 즉 내가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과 하나가 되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 구하면 이룰 것이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우리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생각과 욕구를 구하면서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이 욕구가 육신을 위한 것이 대부분임을 우리들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위한 것도 필요합니다. 영의 일을 하려면 육신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에 의해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무시할 수는 있으나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육의 필요는 영의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 영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육신에 너무 치우쳐 있다 보니 영에 의해 살기보다 육의 의해 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필자 역시 육신의 죄악이 밀려오면 기도하지 않고는 이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육신을 두고 40일간 물도 마시지 않은 채 시험(연단) 받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육신의 장막을 거둘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항상 싸워야 하기에 그때까지는 누구도 온전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온전히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즉 주님과 하나가 될 때는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의 육신의 욕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에 의해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예수님)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2011. 8. 17
서울에서 하나님의 사람 작은 자 솨케드(שקד)
오늘은 비가 온다. 2년 전의 글을 다시 쓰면서 나 자신은 지금도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는가?
어느 날 성령의 의해 느끼고 깨달은 것을 적었을 뿐이다. 늘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늘 성령 안에서 그분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안되는 이유는 영의 의해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육신의 굴레에 눌려 영적인 세계가 가려져 있기 때문임을 나는 안다. 육신의 굴레는 잠시뿐이다. 즉 고난은 잠시인 것, 장차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기에 지금 받는 육신의 고난은 믿음과 소망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은 육신의 종이 되어 육신의 평안을 영의 평안으로 착각하지 않는지...
나는 내 육신이 풍요할 때 한 번도 성령 충만해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글은 고난이 닥칠 때 깨우쳐 주셨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내 자아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도록 내 자아를 비우는 것이다.
그분이 나를 이끄시고 다스리셔야 내가 그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할 때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이끌려 살게 되고 그분 안에 거하게 되며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 자아가 강할 때는 육신의 소욕과 정욕이 죄 가운데서 나를 엄습해 오지만
내가 없으면 그분이 내 자리에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나는 의식이 있을 때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 내 육신이 잠들고 있을 때 그분은 간혹 찾아오신다. 꿈에서 그분을 보이시고 드러내신다. 그리고 깨우치신다. 그래서 그분이 찾아오셔서 나를 만나 주셔야 그분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믿음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서 진리(眞理)와 의(義)의 무기로 싸워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빛이시며, 말씀이시며, 사랑이시다.(사랑 안에 공의가 포함되어 있다.)
나 자신이 주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남을 용서하고 있는지, 나 자신을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내 이웃을 용서하라 하심은 그가 진실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때 용서하라는 것이지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는 자를 용서하라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가 죄 가운데서 뉘우쳐 회개하고 주님께 온전히 나아올 때 죄 사함의 은총이 주어짐과 같은 것이다. 내 안에 이러한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역사하는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온전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어 나를 다스리신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듯이 이를 시험의 대상으로 남에게 다가가서는 더욱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게 자라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역사하시고 계신다. 세상이라는 훈련소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이에 기뻐하자! 감사하자! 기도하자!
2012. 솨케드(שק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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